정부, ‘임신14주까지 낙태 허용’ 입법예고... 찬반측 모두 반발

한석진 기자 입력 2020-10-12 08:00 수정 2020-10-13 08:25
형법 제269조 제1항은 여성이 약물 기타의 방법으로 낙태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형법 제270조 제1항에서는 의사, 한의사, 조산사 등과 같은 의료인이 해당 여성의 부탁을 받거나 승낙을 받은 후 낙태를 하게 하는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형법이 규정하고 있는 낙태죄의 폐지 여부는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온 논쟁거리였다. 폐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초점을, 유지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태아의 생명권 및 낙태 예방 조치 강화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4월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처벌하도록 한 형법 제269조 및 제270조는 임부의 자기 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해 헌법에 위배된다”며 “올해 12월 31일까지 관련 법 조항을 개정하라”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헌법불합치 결정이란 헌법재판소의 심리 결과 법 규정에 위헌성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가 정해준 시점 내에서 법이 개정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법적 효력을 인정해 주는 것을 말한다. 위헌결정을 내려 그 즉시 법적 효력을 정지시킬 경우 초래될 수 있는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다. 만약 헌법재판소가 정해준 시점까지 법이 개정되지 않을 경우 해당 법률은 즉시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정부는 형법 및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지난 7일 입법예고했다. 낙태죄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내린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후속 조치 차원이다.

입법예고란 국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거나 권리와 의무 등과 관련이 있는 법을 제정·개정 또는 폐지할 경우 미리 입법안의 주요 내용을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제도다.

이번 정부의 입법예고안에는 임신 14주까지는 인공유산을 하더라도 처벌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어떠한 사유나 별도 상담 등 절차 없이도 본인이 결정하면 인공유산이 가능하다.

당시 헌법재판소 결정 과정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임신 14주 내외에 대해서 임신중단을 보장해야 한다”며 단순 위헌 의견을 낸 헌법재판관들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국민이 국가의 간섭 없이 사적인 영역에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헌법상 권리를 뜻한다.

미국 연방대법원도 지난 1973년 최초로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인정한 ‘로 vs 웨이드’ 판결에서 “임신 12주까지는 여성이 헌법적 권리에 따라 임신중단을 할 수 있지만 임신 중기인 24주까지는 여성 건강에 위해가 생길 수 있어 임신중단 절차에 국가가 관여할 수 있다”고 판시해 단순 위헌 의견을 낸 헌법재판관들과 동일한 판단을 내린 바 있다.

입법예고안은 추가로 임신 중기에 해당하는 24주까지는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 임신중단을 허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강간 등 범죄행위로 인한 임신, 혈족 또는 인척간 임신이나 임신 지속에 따른 사회적 곤경, 건강을 해칠 우려 등이 대표적인 사유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태아가 모체를 떠나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에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이 경우 여성이 보건소 등 국가가 지정한 기관에 방문해 상담을 받은 뒤 24시간 동안의 숙려기간을 거친 후에야만 비로소 낙태가 가능하도록 규정했다.

또 낙태 시술자를 의사로 한정했으며, 자연유산 유도약물을 허용해 시술방법의 다양성을 보장했다. 의사가 개인적 신념에 따라 낙태 진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그런데 이번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낙태죄 폐지 찬반 양측 어느 한쪽에도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낙태죄 폐지 찬반 양측 모두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우선 여성 단체들을 중심으로 낙태죄 폐지를 찬성하는 측에서는 “정부의 이번 개정안은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고, 오히려 헌재 결정에서 퇴행한 법안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는 “임신중단 비범죄화가 임신 중지율을 높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 사례에서 확인됐다”며 “형사 처벌 방식이 얼마나 여성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여성의 삶과 생명을 더 심각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는 이미 헌법재판소조차 확인했지만 정부는 이에 눈감고 있다”고 꼬집었다.

실제 법무부 자문기구 양성평등정책위원회에서도 “사람마다 신체적 조건과 상황이 다르고, 정확한 임신 주수를 인지하거나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임신 주수를 정해놓고 처벌 여부를 달리하는 건 명확성 원칙에도 반한다”며 지난 8월 낙태죄 전면 폐지를 권고한 바 있다. 낙태 허용 요건은 여성의 입증 부담을 가중하며, 허용 여부를 구분하는 14주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는 취지다. 명확성의 원칙이란 형벌법규는 범죄의 구성요건과 그 법적 결과인 형벌을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이들은 의사가 개인적 신념에 따라 낙태 진료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해 “합법적 낙태에 대한 장벽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성의 임신중지권 보장을 위한 실질적 조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종교 단체와 생명 수호 단체를 중심으로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낙태를 허용하는 방향의 개정법이 불러올 부작용을 문제 삼고 있다.

‘여성과 태아 모두를 위한 여성생명연대(이하 ‘여성연대’라 함)’는 지난달 29일 발표한 성명문을 통해서 “우리나라 낙태의 98%는 사회경제적 사유로 진행되고, 대부분 12주 미만에서 낙태가 이뤄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임신 14주와 사회·경제적 사유의 낙태 허용은 사실상 낙태 합법화다. 그런데 이조차도 거부하며 임신 전 기간에 걸친 광범위한 사유의 낙태를 전면 허용하라는 여성들의 주장은 태아와 여성 모두를 보호하자고 외치는 여성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또 “낙태죄 전면 폐지는 여성의 고통 해결이나 문제 해결이 아니다”라며 “여성들이 준비되지 않은 임신, 원치 않은 임신으로 고통 받으며 도움이 필요할 때, 낙태만 법적으로 허용한다면, 여성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낙태를 합법적으로 강요당하는 오히려 더 큰 여성 차별과 폭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낙태의 무분별한 허용이 아닌 낙태 예방과 임신, 출산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대안 마련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입법예고 이후 연내 법 개정이 되도록 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예고 기간은 법령의 종류와 내용에 따라 상이하나 보통 40일에서 60일이 소요된다. 예고된 법령안에 대해서 국민들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 또한 행정청에서 이에 대한 설명이나 보완이 필요할 경우 공청회를 개최할 수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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