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기업규제 입법 쏟아진다... 재계 “反기업법” 반발 거세

장용진, 김지윤 기자 입력 2019-05-08 15:39 수정 2019-05-08 17:09
  • - 상법 개정안 계류, 산안법 개정안 입법 예고...정부, "글로벌 스탠더드"

  • - 헤지펀드 공격, 기업 기밀 노출 등 부작용 커...미국 등도 도입 신중

  • - 정부 강행 속 공은 국회로...내년 총선이 분기점

정부가 상법개정안 등 이른바 반(反)기업 입법을 속속 밀어붙이면서 재계와 정면 충돌하고 있다. 정부는 땅콩 회항이나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이 기업지배구조 문제와 관련이 깊다고 보고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내세우고 있다. 상법개정안을 발의한 법무부가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검찰 개혁 등 경제·사회 양면에 칼을 빼든 셈이다.

재계는 강력히 반발한다. 정부의 개정안이 글로벌 스탠더드란 주장은 사실과 다르며, 오히려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이나 반도체 등 주력 산업에서 중국의 추격에 빌미만 제공한다는 입장이다. 

8일 정부와 재계에 따르면 지난해 법무부가 발의한 상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어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22일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시행령·시행규칙 전부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환경부는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는 최근 수년간 논란과 갈등의 배경이 됐던 사건들에서 얻어진 사회적 교훈과 합의들을 반영한 법률이라며 개정에 적극적인 자세다.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 이뤄진 만큼 개정의 정당성이 있다는 게 정부의 시각이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지난 3월 올해 업무계획을 발표하면서 ‘공수처 설립’, ‘수사권 조정’과 함께 상법개정을 주요업무에 포함시켰다. 이날 박 장관은 “상법개정안과 집단소송제를 올 상반기까지 입법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 장관은 취임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상법개정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는 우리 기업들이 해외에서 평가절하되는 이유, 즉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으로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를 지목해 왔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 [연합]



상법개정안의 핵심은 △집중투표제 △다중대표소송 △감사위원 분리선출 △전자투표제 의무화 등이다.

집중투표제는 이사 선출 방식의 하나로 2명 이상의 이사를 선출할 때 한 주당 행사할 수 있는 수 이상의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3명의 이사를 뽑는다면 주당 3표의 의결권이 생기는 셈이다. 소액주주 입장에선 표를 특정 후보에게 몰아줌으로써 경영권에 참여할 여지가 생긴다.  

다중 대표소송제는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계열사의 불법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다. 개정안은 지분 50%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제 역시 비슷한 취지다. 감사를 선출할 때에는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것인데, 사실상 기업 총수일가가 감사 선임에 개입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전자투표제는 주주총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더라도 온라인을 통해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는 이 전자투표제를 일정규모 이상의 기업에 의무화하도록 상법을 개정할 계획이다.

법무부는 반발이 상대적으로 약한 다중 대표소송제와 전자투표제 두 가지를 우선 통과시키겠다는 전략으로 재계와 절충안을 모색하고 있다. 법무부 대변인은 “재계와의 대화를 통해 빠른 시일 내 입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명 ‘김용균법’으로 불리는 산안법이나 화관법 역시 같은 맥락이다. 위험한 작업이나 공정, 화학물질 취급과정에서 생긴 사고들에 대한 책임을 원청 기업에 바로 물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기업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정부의 입법 취지와는 달리 기업의 영업활동만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집중투표제 등의 상법개정안이 통과되면 외국투기자본에 경영권을 내주게 되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유환익 한국경제연구원 혁신성장실장은 "지배구조를 소액주주에게 유리하게 하는 방향을 반대하는 건 아니다"면서도 "균형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진국에도 없는 제도를 무리하게 도입한다는 지적도 있다. 최준선 한국기업법연구소 이사장은 “미국, 일본 등에서도 거의 인정되지 않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라며 "(글로벌 스탠더드란) 주장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고 말했다. 

산안법과 화관법은 특히 반도체 등 우리나라 주력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반도체 소재를 만드는 N사 대표는 "유해물질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모든 화학물질을 공개하면 영업기밀이 다 드러난다"며 "요리 레시피를 공개하라는 것과 똑같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법무부는 개정을 강행할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일단 여론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권 상황 때문에 사정은 녹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선거법·공수처법 패스트트랙 지정과 관련해 정국이 경색된 상태이고, 야당인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반대가 만만찮다는 점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사실상 총선 전 기선잡기 국면에 들어선 만큼 20대 국회 내 개정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전망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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