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의 동아줄 '합의'의 그림자

  • 전주환, 합의 불발되자 범행 저질렀다 진술
  • 전주환 전 직장서도 비슷한 사례 존재해
  • 배우 강지환, 피해자와 합의 후 돌연 무죄 주장
  • 합의 과정에서 2차 피해 우려 목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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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9-21 09:15
수정 : 2022-09-2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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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환이 지난 16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정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아주로앤피] 

성범죄에 연루된 이들은 감형을 위해 피해자와 합의를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사건·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서울 중부경찰서는 지난 15일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20대 여성 역무원을 살해한 혐의로 서울교통공사 직원 전주환을 체포했다.
 
전씨는 피해자를 스토킹한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던 중 1심 선고를 하루 앞둔 지난 14일 밤 여자화장실을 순찰하던 피해자를 따라가 흉기로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그는 피해자를 스토킹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던 중 합의가 불발되자 범행을 저질렀다.
 
전씨는 불법 촬영 영상을 유포하겠다며 피해자를 협박하며 만남을 강요했고, 피해자는 이 같은 혐의로 지난해 10월 전씨를 고소했다.
 
그러나 당시 전씨에 대한 구속영장은 기각됐고, 경찰은 피해자를 신변 보호 112시스템에 등록하는 등 안전조치를 한 달간 실시하는 데 그쳤다.
 
또다시 스토킹에 시달리던 피해자는 올해 1월 27일 전씨를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경찰에 재차 고소했고 전씨는 첫 판결이 나오기 전인 지난 14일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전씨는 조사 과정에서 범행 동기에 “합의가 안 됐다. 어차피 내 인생은 끝이 났다”며 합의 불발이 범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했다.
 
과거부터 성범죄에 대한 ‘합의’는 가해자에 대해 족쇄를 풀어주는 도구로 여겨졌다.

일각에서는 합의에 나서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 없지만 2차 피해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연합뉴스]

◆전주환 소속이던 서울교통공사에 유사 사례 있어
김정섭 서울교통공사 노동조합 교육선전실장은 지난 20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신당역 살인 사건 가해자가 범행 전 피해자에게 합의를 위해 접근한 방식과 유사한 사건이 다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이 자리에서 “사내 성폭력 가해자가 합의를 종용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등 2차 가해가 있었다”며 “노조 주관으로 시스템 개선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내 성폭력으로 가해자가 직위 해제됐지만 (합의를 위해) 가해자 본인 또는 가해자 가족과 지인 등이 피해자에게 접촉하는 사례가 있었다”며 신당역 사건 외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노조 측이 사내 성폭력 피해 사례를 모니터링한 결과 △가해자가 피해자 집에 찾아와 몸싸움 △가해자 형수가 근무지에 찾아와 합의 종용 △가해자와 친분이 있는 동료들이 전화를 걸어 압박 행사 등 다양한 방식의 2차 피해가 신고됐다.
 
김 실장은 “(사내 2차 가해와 관련한) 사례를 최대한 많이 수집하고 개선책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배우 강지환 [사진=연합뉴스]

◆합의해줬는데 돌연 무죄 주장한 배우 강지환
성폭행 사건에 연루된 배우 강지환은 합의 후 좋지 않은 예를 남겼다.

여성 스태프를 성추행·성폭행한 혐의를 받던 배우 강지환은 피해자와 합의해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런데 상급심으로 가서 강지환은 태도를 바꿔 무죄를 주장했고 피해자들은 이 과정에서 2차 가해를 당했다고 호소했다. 대법원은 강지환 측 주장에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해 최종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준강간·준강제추행 혐의를 받던 배우 강지환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인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2019년 7월 9일 강지환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자택에서 스태프들과 술자리를 했는데 여기서 여성 스태프 2명이 취침하고 있던 방에 들어가 이들을 준강간·준강제추행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후 피해자 측 법률 대리인은 강지환 소속사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공개했다. 소속사 관계자는 피해자들에게 “너희 재판 나갈 때 사진 찍힐 건데 그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이냐”며 “이렇게 끌다가는 너희도 보상 못 받는다. 오늘이 골든타임이다”라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강지환은 피해자들과 합의했다. 그러나 2·3심으로 넘어가며 돌연 태도를 바꿨다. 그는 “범행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면서도 “피해자를 추행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강지환이)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사실을 사과하겠다고 해 합의한 것이다. 강지환이 범행을 사과하고 반성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피고인에 대한) 피해자들이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밝혔지만 성범죄 특성상 그들의 피해가 모두 회복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사후 피고인에게 고액의 합의금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피해자 진술에 대해 신빙성을 배척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사진=연합뉴스]

◆“합의 강요하지 마세요”
이렇듯 가해자들은 형량을 줄일 목적으로만 합의를 이용해왔고, 판사들은 합의에 나서는 가해자들을 곱게 볼 수만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합의 과정 중 부작용을 우려해 판사들이 직접 경고한 사례도 있었다.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지 피고인이 원한다고 합의를 종용하면 안 된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4월 황희동 판사(서울고법 형사11-2부)는 합의를 위해 재판을 연기해 달라고 주장하는 준유사강간 혐의를 받던 A씨에게 이같이 말했다.
 
A씨는 황 판사에게 “합의를 아직 못했다. 아들이라도 보내겠다”며 재판을 연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황 판사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데 필요 이상으로 접촉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다면 합의 노력은 역효과가 될 수 있다”며 “(본인 주변인이 직접 나서지 말고) 피해자 변호사를 통해서 합의하라”고 덧붙였다.
 
송승훈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도 같은 보도에서 “(합의 때문에 기일을 여유롭게 달라고 요구하는 사례도 있는데) 이는 재판부가 합의를 종용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며 “물론 합의가 원만히 이뤄져 피해가 일부 회복된다면 좋은 일이지만 피해자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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