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법] 저항과 생명의 시인 김지하…옥살이와 국가 배상

  •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 발표한 김지하 시인 별세
  • 긴급조치4호·반공법 위반 등으로 수차례 복역
  • 2015년 국가로부터 15억 배상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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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5-09 10:58
수정 : 2022-05-09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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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작품을 남긴 김지하 시인이 8일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14년 10월 31일 서울 종로구 견운동 옥션단에서 열린 수묵산수전 '빈 산'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작품을 남긴 김지하 (본명 김영일)시인이 8일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아주로앤피>는 그가 얽힌 법률적 이슈를 살펴봤다. 독재 정권 아래서 어떤 이유로 복역했는지, 국가로부터 어떤 배상을 받았는지 알아봤다.

토지문화재단 관계자는 8일 “투병생활을 하던 김 시인이 8일 오후 4시경 강원도 원주시 자택에서 타계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에 마련됐다.

김지하 시인은 소설 ‘토지’의 작가인 고 박경리 선생의 사위이기도 하다.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1966년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 ‘시인’에 ‘황톳길’, ‘비’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 등단했다.

이후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 시를 발표하며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문인으로 주목받았다.

김 시인은 1992년 그동안 써낸 시들을 묶어 ‘결정본 김지하 시 전집’을 출간했다. 이후에도 △중심의 괴로움(1994) △화개(2002) △유목과 은둔(2004) △비단길(2006) △새벽강(2006) △못난 시들(2009) △시김새(2012) 등을 발표하며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2018년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정부 비판적 태도…수차례 복역
김지하 시인은 4·19혁명 당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남쪽 학생 대표로 활동했다.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며 ‘서울대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소속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4개월간 복역했다.

김 시인은 1970년 월간지 ‘사상계’에 정부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풍자시 ‘오적’을 발표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100일간 수감됐다. ‘오적’은 부정하게 부를 축적한 재벌·국회의원·고급 공부원·장성·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댔다.

당시 정부는 사상계를 폐간하고 오적을 실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을 압수조치했다. 김 시인을 비롯한 사상계 대표와 편집장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1974년 4월 26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발표를 했다. [사진=KTV국민방송 유튜브 캡처]

1974년엔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구속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이후 국내외 시인들에 의한 구명운동이 전개되면서 10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글을 썼다가 재수감돼 1980년까지 6년여간 복역했다.

민청학련 사건이란 1974년 제4공화국 유신정권에서 선포한 ‘긴급조치 4호’에 의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중심으로 180명이 구속·기소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정부가 민주화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고 무차별적인 고문을 가한 인권탄압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바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하고, 대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절 금지시켰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유신헌법 위반 혐의로 1024명을 조사했고 이들 중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180명을 구속기소했다. 군사정권 통제하에 있던 법원은 중앙정보부의 기소내용을 모두 인정해 민청학련 지도부 6명에게는 사형, 주모자급은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는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 선고했다.

사건이 조작됐다는 비난이 일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8월 23일 전격적으로 긴급조치 4호를 해제했다. 다음해인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를 통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 대부분을 석방했다.
 

김지하 시인이 지난 1988년 9월 1일 서울 여의도 백인회관에서 열린 88서울민족문학 페스티발에서 세계문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 하고 있는 모습.[사진=연합뉴스]

◆민주화운동 상징에서 ‘변절자’까지
1975년 김지하 시인은 ‘타는 목마름으로’를 발표했다. 이 시는 1980년대 민주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이후 김광석·안치환 등 당시 가수들은 이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2002년 4월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고 수락 연설을 하던 자리에서 ‘타는 목마름으로’를 불러 화제가 됐다.

민주화의 상징으로 주목받았던 김지하 시인은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기고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중 전경의 구타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에 대한 비판을 담은 칼럼이다. 목숨을 버리면서 하는 민주화 시위를 ‘저주의 굿판’에 비유했다.

김 시인은 칼럼에서 “자살은 전염하며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라며 “열사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면서 당시 민주화 시위가 연이은 자살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칼럼이 알려지자 당시 민주화운동 진영은 김 시인을 ‘변절자’라고 비난했다. 진보 성향 문인 단체였던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김지하 시인을 제명했다. 김 시인은 민주주의 운동가들이 칼럼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매도한다며 분노했고 여러 차례 정신병원 진료를 받기까지 했다.

김지하 시인이 2013년 5월 9일 오후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항소심 선고 공판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억울한 옥살이…국가로부터 15억 배상받아
김 시인은 2013년 열린 재심에서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서는 무죄를, ‘오적’ 필화사건은 자료 부족으로 징역 1년의 선고유예를 받았다. 이후 정부는 무죄 판결을 받은 부분에 대한 형사보상금 4억2800여만원을 배상했다.

이 결과와 별개로 그는 2014년 5월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35억원을 청구하는 손해배상 청구 항소심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당시 김 시인은 소장에서 “국가의 용납할 수 없는 반민주적 불법행위와 원고들이 입은 손해의 중대성 등을 고려해 이에 상응하는 거액의 위자료를 배상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은 “국가는 김씨 등에게 15억여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김씨에 대한 위자료를 15억5000만원으로 정하고 앞서 형사보상금으로 받았던 4억2800여만원을 제외한 금액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심 재판부는 “김씨는 수사 과정에서 최소한의 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했고 극심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주는 가혹행위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김씨는 30대 중 6년 보름 남짓한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라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진행된 항소심에서 서울고법은 “1심 재판부가 인정한 위자료 액수는 적절하고 너무 적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고와 피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한다”고 선고했다. 검찰이 상고를 포기하면서 판결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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