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기의 관점]대법 판결 부정한 '강제 징용 판결', 비난만 할 일 아니다

김낭기 논설고문 입력 2021-06-14 12:53 수정 2021-06-21 08:27

1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양대노총 및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징용 소송 각하 판결을 규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중앙지법이 대법원 판결과 정반대 되는 판결을 내려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 34부(재판장 김양호 부장판사)가 내린 일제시대 강제 징용자 판결이 그것이다. 김양호 부장판사는 “강제 징용 피해자들은 (한·일 국가와 국민 간의 청구권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한다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권한이 없다”고 지난 7일 판결했다. 이 판결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소송을 낼 수 있다고 한 2018년 대법원 판결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판결이다.

서울중앙지법 판결이 나오자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반국가적, 반민족적 판결을 내린 판사의 탄핵을 요구한다”는 청원이 올라왔다. “과연 이 자가 대한민국 국민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라고 했다. 현재 30만명 이상이 참여했다. 법원 공무원 조노는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원용한 판결”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이미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강제징용 불법행위에 대한 피해자 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면서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1심 판사가 이렇게 부정한 것은 상당히 우려스럽다"고 했다.

'반민족적 판결' · '판사 탄핵' 주장까지 나오지만

그러나 비난만 할 일은 아니다. 서울중앙지법 판결이 그래도 한 가지 ‘기여’를 한 게 있다. 대법원이 2018년 내린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권 인정 판결을 다시 검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까지 올라갈 것이고 그래서 다시 한번 대법원 재판이 벌어질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하급심 판결을 구속하는 힘이 있다. 하급심은 대법원 판결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같은 사건’에 대해서만 그렇다. 아무리 소송 내용이 같다고 해도 원고와 피고가 다르면 ‘같은 사건’이 아니다. 2018년 대법원 판결과 이번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것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소송 당사자들이 다르다. 대법원 판결의 원고는 고 여운택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 피고는 일본제철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판결의 원고는 송모씨 등 강제 징용 피해자들과 그 유족 등 85명이고 피고는 일본제철, 닛산화학 ,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기업 16곳이다.

소송 내용이 같더라도 소송 당사자가 다르면 ‘같은 사건’이 아니고 따라서 하급심이 이미 나온 대법원 판결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법원조직법 규정이다. 이 규정은 소송 절차를 정한 것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사법제도가 살아 숨쉬게 하는 활력소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손해 배상 청구권 소송에서 소송 당사자가 누구든 무조건 기존 대법원 판결을 따르도록 한다면 하급심 판사 누구도 대법원 판결과 다른 논리와 법 해석을 제시할 여지가 없게 된다. 그러나 소송 내용이 같더라도 소송 당사자가 다르면 기존 대법원 판결을 따르지 않아도 돼 있는 규정 덕분에 하급심 판사들이 대법원 판결과 다른 논리와 법 해석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대법원은 하급심 판결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기존 대법원 판결을 재검토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대법원 스스로 기존 판례를 보다 더 합리적으로 바꿀 수 있는 시스템이 작동된다.

대법원이 기존 판례를 재검토할 필요성이 큰 경우는 재판 쟁점을 둘러싸고 사회 여론이 갈라지고 법관들 사이에도 논리와 해석이 분분할 때다. 여론이 갈라지고 논리와 해석이 분분하다는 것은 그만큼 따지고 생각해 봐야 할 게 많고 복잡하다는 뜻이다. 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 소송이 바로 그런 경우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 인정 여부를 놓고 우리 사회 여론은 찬반으로 갈라져 있다. 의견 분열은 대법관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2018년 대법원 판결에서 대법관 13명 중 11명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인정된다는 ‘다수 의견’을 냈고, 2명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반대 의견’을 냈다. 크게 보면 의견 차이가 없는 것같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수 의견 11명의 의견도 각양각색이다. 똑같은 사실을 두고 같은 대법관들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의견이 다를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청구권 인정한 2018년 대법 판결  재검토할 기회 제공

예를 들면,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이 일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근본 문제부터 의견이 제각각이다.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대법관 11명 중 어떤 대법관들은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게 아니다’라고 한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손해배상(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다. 그런데 한·일 협정이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게 아니기 때문에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불법성을 전제로 손해배상 청구권을 내는 것은 한·일 협정 위반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반면 11명 중에서도 다른 대법관들은 한·일 협정 체결 당시 한·일 양국이 불법성을 전제로 한 손해배상도 당연히 한·일 협정의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상호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인다고 했다. 손해배상 청구권을 아예 인정하지 않은 반대 의견을 낸 대법관 2명도 한·일 양국이 식민 지배의 적법성과 불법성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았다고 했다. 식민 지배의 불법성도 고려했다는 뜻이다.

당시 일본이 한국에 제공한 경제협력자금 5억 달러에 식민 지배에 대한 일본의 손해배상 성격이 포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느냐를 놓고서도 의견이 다양했다. 다수 의견 11명 중 어떤 대법관들은 포함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대법관들은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반대 의견을 낸 2명도 포함돼 있다고 봤다.

한·일 청구권 협정 제2조에는 “한·일 양국은 상대방 국가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 간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며 “한·일 양국 및 그 국민은 상대방 국가 및 그 국민에 대해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돼 있다. 또한 이 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에는 “협정문에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보는 청구권에는 한국 측으로부터 제출된 대일 청구 요강 8개 항목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포함돼 있고 따라서 이 8개 항목에 관해서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게 됨을 확인했다’라고 돼 있다. 8개 항목 중 제5항에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 협정과 합의의사록 문안의 해석을 놓고도 대법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다. 일부 대법관들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청구권에 ‘피징용자들의 기타 청구권’도 들어 있기 때문에 강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국가나 일본 국민(기업 포함)에게 더 이상 어떤 청구권도 행사할 수 없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다른 대법관들은 ‘위자료 청구소송은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것인데, 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은 식민 지배의 적법성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위자료 청구 소송은 여전히 가능하다’고 했다.

대법관들도 의견 분분···보다 설득력 있는 논리 제시 아쉬워

이처럼 다수의견을 낸 대법관 11명은 1965년의 한·일 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인정된다는 결론에서는 같다. 그러나 그 결론에 이르게 된 논리와 법 해석은 대법관들 사이에 각양각색이다. 대법관들은 “~으로 보인다” “~인지가 불분명하다”는 등 주관적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이는 협정과 그 부속 문서 조문의 해석과 그 해석을 뒷받침하는 논리 구성에 법관들의 주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래서 대법관이 바뀌면, 또는 같은 대법관이라도 시대 흐름이 바뀌면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고 그 결과 최종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법원이 재판 결과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동의를 받으려면 결론에 이르게 된 논리와 법 해석에서 설득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설득력을 인정받으려면 대법관들 사이에서부터 의견 분열이 최소화돼야 한다. 중요 쟁점에 대해 광범위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대법관들조차 각양각색인 논리와 해석을 내놓고서 이 판결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납득하겠는가. 이런 점에서 대법원 판결은 재검토가 필요하다. 다행히 서울중앙지법 판결이 그 재검토의 기회를 제공했다. 서울중앙지법 판결은 대법원에 도전했다고 힐난받을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검토와 합리적 해석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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