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쟁점] 회식 다음 날 새벽 5시 출근중 ‘음주운전 사망’ 法“업무상 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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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명섭 기자]

전날 회식 자리에서 과음을 한 뒤 다음 날 새벽 출근을 위해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지난해 6월 한 리조트에서 조리사로 근무하던 A씨는 직장상사인 주방장의 제안으로 같이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 중에 협력업체 직원도 합석했다. 자연스럽게 과음으로 이어져 식사 자리는 밤 11시경이 돼서야 끝났다.

전날 과음 탓에 A씨는 출근 시간인 새벽 5시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주방장의 전화를 받고서야 겨우 잠을 깰 수 있었다. A씨는 급히 자동차를 몰고 집에서 20여분 떨어진 근무지로 향했다.

A씨는 제한속도 시속 70㎞인 도로에서 시속 151㎞로 운전하다 중심을 잃고 미끄러져 도로변의 가로수 등을 들이받는 사고를 내고 숨졌다. 경찰 조사 결과 사고 당시 A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정지에 해당하는 수준인 0.077%였다.

A씨의 아버지 B씨는 “A가 교통사고로 숨진 것은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례비를 지급하라”는 신청을 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A씨는 음주와 출근길에 규정 속도를 크게 벗어난 속도로 운전하다가 사고가 나 숨진 것이므로 업무상 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B씨가 신청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을 거부한다”는 내용의 처분을 내렸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 제2항은 근로자의 고의나 자해행위, 범죄행위 또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재해(부상·장애 또는 사망)는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A씨의 음주 및 출근길 과속운전을 범죄행위로 본 것이다.

반면 대법원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 제2항이 범죄행위에 따른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 이유는 업무와 관련 없는 위법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징벌로써 보험급여를 지급하지 않겠다는 취지”라며 “따라서 (근로자가 한 행위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규정하는 범죄행위로 보려면 그 행위가 고의나 자해행위에 준하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B씨는 지난해 11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하지 않은 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서울행정법원에 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재판장 김국현 수석부장판사)는 대법원 판례에 따라 우선 “근로자가 형사책임을 부담해야 하는 법 위반행위를 했다는 것만으로 곧바로 산업재해보상법상의 ‘범죄행위’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업무상 재해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위반행위와 업무관련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만약 A씨의 과실로 사고가 발생했어도 A씨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급히 자동차를 몰다 사고를 낸 결과 사망했다고 인정된다면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있다는 취지다. 업무관련성(업무기인성)이란 근로자의 사망 등과 같은 재해가 업무 때문에 발생하였다(인과관계)고 인정되는 관계를 말한다.

재판부는 “채용된 지 약 70일이 지난 A씨가 직장 상사인 주방장의 식사 제안을 거절하거나 후에 협력업체 직원이 합석한 술자리에서 자유롭게 종료 시간 등을 결정하기가 사실상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A씨가 과속운전을 한 이유도 전날 과음으로 늦잠을 잔 뒤 최대한 근무지에 빨리 도착하려다 낸 사고”라고 보았다.

그 결과 재판부는 “이 사고가 A씨의 과실로 발생했다고 해도 출근하는 과정에서 발생했고, 고인이 일한 주방에서의 지위, 음주·과속 운전 경위를 고려할 때 고인의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가 단절됐다고 보기 어렵다. 교통사고처리특례법에 따른 징벌에서 나아가 업무상 재해성을 인정하지 않아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보험금 지급을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고인의 사망은 업무상 재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하면서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뒤집고 B씨의 손을 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