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광주가 21세기 서울에서 재연될 뻔 했다”
지난 2018년 이른바 ‘기무사 계엄문건’이 공개됐을 때, 문건내용을 다룬 기사에 붙은 댓글이다. 이 기사만이 아니었다. 기무사 문건을 다룬 기사들 마다 비슷한 내용의 댓글이 한두개 쯤은 붙어 있었다. 댓글 뿐만이 아니었다. SNS에는 ‘큰일 날 뻔 했다’ ‘소름끼친다’ ‘80년 광주가 옛날일이 아니다’는 댓글이 수두룩하게 달렸다.
‘기무사 계엄문건’은 2016년말과 2017년초 박근혜 퇴진촉구 촛불집회를 군사력으로 진압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국정농단 사태가 폭로되면서 촉발된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는 헌정사상 첫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다.
선거로 뽑힌 대통령을 국민의 요구에 따라 퇴진시키는 비상상황. 하지만 우리 국민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의사를 표현하고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정권을 퇴진시켰다. 가히 정치선진국에서나 볼 수 있었던, 우리 국민이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업적이엇다.
미국과 유럽 등 서구에서나 볼 수 있었던 질서정연하면서도 합헌적으로 시민혁명을 진행하는 모습을 대한민국 국민은 보여줬다. 쿠데타와 유혈진압 등 비극으로 점철됐던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는 물론 우리의 과거 역사와도 다른 모습이었다. 전 세계 어디와 비교해도 단연 돋보일 성숙한 민주주의다.
우리 국민들이 이렇게 진일보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던 바로 그 때, 이 나라의 군대는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어두운 골방에 웅크리고 앉아 만들었다는 것이 바로 ‘기무사 계엄문건’이다. 유출이 두려워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만들었다던 그 문건에는 탱크로 민주주의와 시민들을 짓밟을 계획이 담계 있었다. 군부가 무력으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뒤 이미 운명이 다한 박근혜 정권을 연장시키려 했던 것이다.
심지어 야당이 국회 과반수를 장악하고 있는 점을 거론하며 야당의원을 체포‧구금해 계엄해제 결의를 무산시키고 국회 주변에 군단급 규모의 부대와 탱크 등 중화기를 배치하는 계획까지 세워져 있었다. 세종로와 여의도, 강남은 물론 전국 주요도시에 배치할 군부대를 미리 정해뒀고 특전사와 해병대 등 정예전투 병력을 동원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나라를 지키라고 월급을 주고 키운 군대가, 나라 지키라고 사준 최신예 무기로 국민들을 학살하려 한 거다.
명분은 ‘탄핵이 기각되면 발생할 소요사태를 막는다’였지만 사실은 탄핵심판을 진행하고 있는 헌법재판소를 급습해 기능을 정지시키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겠다는 의도가 걸러지지 않는 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기무사 계엄문건’은 이처럼 온 국민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평화로운 것은 물론이고 다채로운 문화행사까지 함께 진행됐던, 그래서 전 세계가 놀라워했던 촛불집회가 한 순간에 피비린내로 검붉게 물들뻔 했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그 경악할만한 ‘문건’을 만든 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아니 누가 만들었는지 누구의 지시로 만들었는지 그 진실조차 아직 모른다. 잔챙이 몇몇이 기소됐지만, 그마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진실을 밝힐 의무가 있는 검찰은 핵심 피의자인 조현천 당시 기무사령관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이유로 수사를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
조현천은 계엄령 문건 사태가 터지기 조금 전 미국으로 출국한 뒤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벌써 3년 전이다. 하지만 검찰은 물론 그 어떤 수사기관도 핵심 피의자인 조 前기무사령관을 송환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그의 거주지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9년 7월 윤석열 검찰총장이 취임하자 사람들은 그간 검찰이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들을 ‘알렉산더의 매듭’처럼 풀어낼 것으로 기대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물론 기무사 계엄문건 사건도 단박에 해결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는 조국 前장관과 그 가족의 주변을 뒤집는데 시간을 보냈을 뿐, 정작 국민들이 기대했던 사건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현천 前기무사령관에 대한 불기소처분 통지사에 찍힌 ‘서울중앙지검장’의 직인으로 온 국민들을 다시 한번 실망시켰을 뿐이다.
윤 前총장 측은 ‘당시 기무사 계엄문건 특별수사단은 민간검찰과 군검찰의 합동수사팀으로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의 지휘를 받았고, 당시 중앙지검장이던 자신은 개입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산시스템 상의 체계 때문에 자신의 직인이 찍히기는 했지만 실제 관여는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럴싸한데 참 옹색하게 들린다. 게다가 어째 전에도 많이 들어본 듯 구리구리한 구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중앙지검장때야 그렇다고 치고 정말 수사를 할 의사가 있었다면 검찰총장이 된 이후에는 뭐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라를 뒤집으려한 군사쿠데타 기도인데 그런 사건을 그냥 뒀다는 것이 믿지기 않는다. 그렇게 법과 절차, 정의를 강조했던 사람이라면 뭐라도 했다고 생색이라도 내야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윤 前총장은 기무사 계엄문건 사건과 관련해서는 지금까지 책임있는 한 마디를 한 적이 없다. 서울 한 복판 광화문 일대가 피바다가 되고 수도 서울이 시쳇더미에 묻힐 뻔 했는데 도대체 뭘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윤 前총장은 물론 검찰 전체가 마찬가지다. 참 무능하기 짝이 없다. 외국을 운운하는 변명을 하기에는 검찰이라는 이름이 아깝고, 그 자리에 임용되기 위해 친 시험들이 아깝다. 압수수색을 하겠다며 청와대를 몇 번씩이나 쳐들어가고, 직속 상관인 법무부 장관의 자택을 뒤지고, 고등학생 봉사활동의 진위를 밝히겠다며 대학 몇곳을 들쑤셔 놓았던 그 기백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 윤석열 前총장은 자신에게 유독 호의적인 한 언론사를 통해 5.18과 광주에 대해 언급했다.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들먹이며 독재에 저항이니 운운한 것은 물론이고, 문재인 정권이 광주를 쓰고 버렸네 어쩌네 하는 소리도 한 모양이다.
5.18과 같은 비극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질 뻔 했는데, 그 주범을 잡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검찰총장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립서비스’라 그러려니 하겠지만 듣고 있자니 역겹다.
윤석열. 그 입에 5월과 광주를 올리지 말라. 적어도 조현천을 왜 잡아오지 못했는지 제대로 설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추신 : 고소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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