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실수해도 배상 없다?…"명시적 손해배상 규정 필요"

  • 영장 누락해도, 서류 분실해도 피해자에 손해배상 '無'
  • "유독 법관만 중과실 따져…사법부 해석만으론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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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3-25 11:12
수정 : 2024-03-2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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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대 신임 대법원장오른쪽이 지난해 12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을 마치고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조희대 신임 대법원장(오른쪽)이 지난해 12월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을 마치고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과 인사하고 있다. [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재판 과정에서 판사의 실수로 재판 당사자가 피해를 입더라도 국가가 손해를 배상한 사례가 사실상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법관의 재판에 대해 국가배상책임을 넓게 인정하면 법관 독립을 침해하고 사법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판사의 과실 판단을 다른 판사의 자의적 판단에 맡길 게 아니라, 국가배상에 관한 명문화된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25일 아주로앤피 취재를 종합하면, 대법원은 법관이 오판으로 법령이나 직무상 기준 등을 위반한 경우 등 재판상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지 않다. 법관의 위법행위를 인정하면서도 별도 요건을 내세워 이를 충족하지 않았다면서 국가배상책임을 부정하는 식이다.
 
실제 사례를 보면, 대법원은 영장발부와 관련된 법관의 실책에 대해 국가배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법관은 A씨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면서 압수수색할 물건의 기재를 누락했다. 압색 영장에 의해 A씨는 여권을 압수당했고 업무상 출국을 했어야 했지만 여권이 없어 출국 하지 못했다. 이후 압수수색 물건 기재 누락을 알게 된 A씨가 당시 출국을 하지 못해 영업상 손해를 입었다며 소송을 냈다.
 
하지만 대법은 압수수색 대상물의 기재가 누락된 압수수색영장 발부 행위가 법령의 규정을 따르지 않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이같은 법관의 직무행위가 국가배상법상 불법행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압수수색 대상물이 기재되지 않은 압수수색영장 발부 등의 행위는 영장주의 원칙을 규정한 헌법 제12조, 압수수색영장 등의 기재사항 등을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114조, 압수수색영장 집행 시 압수조서와 압수목록을 작성하도록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219조, 12조 등을 위반해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하면서도 "법관이 위법 또는 부당한 목적을 가지고 재판하는 등 부여된 권한의 취지에 명백히 어긋나게 이를 행사했다고 인정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이로써 바로 재판상 직무행위가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에서 말하는 위법행위가 돼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보전처분 절차에서도 법원이 국가배상책임을 부인한 사례가 있다. B씨는 민사집행 사건에서 적법한 제소명령 기간 내 제소를 했는데, 재판부가 제소기간 만료일을 오인해 가압류취소결정을 했다. 법관의 절차상 과오로 인해 원고는 배당을 받지 못하게 됐다. 대법원은 B씨가 가압류취소결정으로 인한 긴급한 손해를 방지하기 위해 효력정지를 신청할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신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민사집행법 제289조와 제301조는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 당사자의 신청에 따라 가압류취소결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도록 하고 있고 가처분취소결정에 대해서도 이를 준용하고 있다"며 "재판작용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에 관한 판례는 재판에 대한 불복절차 또는 시정절차가 마련돼 있으면 이를 통한 시정을 구하지 않고서는 원칙적으로 국가배상을 구할 수 없다는 것으로, 보전재판이라고 해서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 마디로 재판상 법관의 위법행위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고, 법관이 위법·부당한 목적을 갖고 재판했다거나 부여된 권한의 취지에 명백히 어긋나게 행사했다고 인정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어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입장이다. 또 재판에 대해 불복 또는 시정 절차가 마련돼 있는 경우 법관의 귀책 사유로 불복에 대한 시정을 구할 수 없었다거나 그와 같은 시정을 구할 수 없었던 부득이한 사정이 없다면 국가배상에 의해 구제를 받을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여기엔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해 법관의 재판행위에 대해 불법행위 책임을 묻는 것이 법적 안정성과 법관의 독립을 침해한다고 보는 법원의 인식이 깔려 있다.
 
물론 해외에서도 법관 면책은 어느 정도 인정된다. 영국은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판사가 재판권이 없는데도 재판행위를 하는 경우 등에만 손해에 책임을 지도록 한다. 미국도 법관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편이다.
 
독일기본법 제34조는 공적 직무를 수행하면서 직무 의무를 위반하면 원칙적으로 국가가 책임을 진다고 규정한다. 다만 민법 제839조 2항에서는 재판과 관련한 특권규정을 두고, 법관이 직무상 의무(고의적인 법 왜곡 등)를 위반할 때만 그로 인한 손해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한다.
 
그러나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판사 면책에 대한 명문화된 법령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전상화 변호사는 "민법과 국가배상법에 의하면 불법행위 성립 요건은 △고의 또는 과실 △위법행위 △손해발생 세 가지인데, 법관에게 예외를 인정하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다"며 "그럼에도 대법원 판례는 유독 법관인 경우에만 고의를 넘어 '목적'을 요구하고, 과실을 넘어 '중과실'을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남철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는 "판례가 인정하는 '위법 또는 부당한 목적을 가지고 재판을 하는 것'이라는 기준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며 "대법원은 아무런 법률적 근거 없이 불복절차나 시정절차 등의 사법상 구제절차를 국가배상책임을 부인하는 논거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헌법상 보장된 국가배상청구권의 형해화를 초래한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법관의 재판에 불법행위가 인정되는 사례가 늘고 있어 성립요건을 사법부의 해석에만 맡겨두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입법정책적인 관점에서 국가배상법에 법관의 재판행위에 대한 면책 대상을 확정하고, 예외적으로 재판상 불법에 대해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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