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분야 코너] 6쪽짜리 노동법

  • 노동분야 │ 송연창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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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2-19 09:29
수정 : 2024-02-19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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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연창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송연창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노동변호사로 일하다 보니 주변에서 노동법에 관한 질문을 정말 많이 받는다. 간혹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정도로 어려운 쟁점도 있지만, 법령에 적힌 대로만 따라해도 해결되는 쉬운 질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답을 주면 대개는 “뭐라고 검색해야 하는지조차 몰라서 막막했는데, 듣고 보니 간단한 거였구나” 하는 반응이 돌아온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든다. 이거, 학교에서 가르쳐주면 안 되나?

실은 지금도 학교에서 노동법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어디에서 다루고 있는지 찾기가 어려울 뿐. 현재 노동법을 가장 비중 있게 가르치는 과목은 고등학교 사회과 선택과목인 「정치와 법」이다. 인터넷에 공개된 한 출판사의 「정치와 법」 교과서를 보자. 부록을 제외하면 약 200페이지 분량인데, 노동법을 다룬 본문은 고작 6면에 불과하다. 이 작고 소중한 페이지에 개별적·집단적 근로관계와 연소자의 근로계약, 그리고 노동위원회를 통한 권리구제 절차까지 전부 소개하려다 보니 교과서가 미어 터질 지경이다. 더군다나 수많은 내용들이 빽빽하게 나열되어 있으니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사치이다. 지금의 내용은 단순한 ‘암기용 텍스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럼 「정치와 법」을 공부하는 학생의 수는 얼마나 될까. 2024학년도 기준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이 과목을 응시한 학생은 대략 3만 명, 전체의 6% 정도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목과 수능 응시 영역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94%의 학생들은 6쪽짜리 노동법도 훑어보지 못한 채 성인이 된다는 의미다. 2025년부터는 고등학교에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됨에 따라 「정치와 법」은 「법과 사회」로 개편된다. 하지만 현재까지 발표된 바에 따르면 노동법 관련 내용이나 분량은 대동소이하다. 심지어 해당 교육과정이 적용되는 2028학년도 수능부터는 고1 공통과목인 「통합사회」 만을 출제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법과 사회」는 수능 출제 영역에서마저 제외되게 된다. 

그동안 청소년기 노동법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걸까? 그렇지도 않다. 서울을 비롯해 많은 시·도교육청에서 이미 노동인권교육 관련 조례를 제정하였고, 21대 국회에서도 <학교노동인권교육의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 등 이름과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관련 법률안들이 여러 차례 발의된 바 있다. 170여 개 단체가 모여 2021년 발족한 <학교부터노동교육운동본부>라는 단체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그동안 야권과 노동계만이  꾸준히 이와 같은 주장을 제기해 왔을 뿐, 보수진영이나 경영계에서는 마치 금기어라도 되는 양 노동교육의 ‘노’자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참 이상한 현상이다. 아무리 노동법이 태생적으로 사회법적 성격을 갖는다 한들,  노동법이 어디 진영을 가려가며 적용되는 법이던가? 경제활동을 할 의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성인이 되어 근로자로 직장에 취업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용자가 돼 다른 사람들을 고용하는 입장이 될 수도 있다. 혹은 당장 프리랜서나 개인사업자로 일하게 되더라도, 이들이 평생 1인사업자의 지위에 머무른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직원으로 살든, 사장님으로 살든, 우리 모두는 정치적 이념과 관계 없이 노동법의 영향 아래에 있는 셈이다.

노동교육의 필요성을 외치는 입장에서는 주로 노동의 의미와 가치, 노동인권, 근로자의 권리와 같은 키워드를 내세운다. 하지만 노동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근로자만큼이나 사용자의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나름 합리적인 처우를 제공했다고 생각했지만 법에 규정된 각종 수당 지급의무를 알지 못해 임금체불이 되기도 하고,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에 부당노동행위가 성립하는 일도 허다하다. 실제로도 법원이나 노동위원회의 사건들을 들여다 보면, ‘알고도’ 생긴 다툼만큼이나 ‘몰라서’ 발생한 노동분쟁 역시 만만치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이념에 갇혀 한 쪽은 찬성을, 다른 한 쪽은 반대를 외치는 바람에 계속해서 논의가 공전되는 모습은 다소 안타깝다(앞서 말한 법률안들 역시 21대 국회의 임기 만료로 곧 폐기될 운명이다). 본격적인 노동교육은 커녕, 교육목표나 교육과정 시안에 ‘노동’이라는 단어를 넣고 빼는 문제만으로도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노동권 보장을 위한 오랜 역사를 부정하는 취지는 결코 아니지만, 사회적 합의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노동계에서도 이념의 색채를 어느 정도 걷어내고 실용적 노동교육을 주장하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경영계 역시, 노동법을 잘 아는 기업가가 많아질수록 건전한 기업문화 형성과 불필요한 쟁송 방지에 도움이 됨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청소년기 노동교육의 필요성을 보다 전향적으로 검토하였으면 한다. 이를 통해 모두가 일찌감치 노동법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갖출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노·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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