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례로 보는 세상] 퇴직금 안 주려고 변칙적 탈법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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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서류상으로만 직원들을 다른 업체로 이직시키는 등 꼼수를 부려온 악덕업주들의 행태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비록 외형적으로 채용법인이 달라졌다고 해도 채용의 실질에 변화가 없다면 재직기간을 합산해서 인정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형식과 실질이 상이할 때,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실질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이 일반적 법리이다. 그러나 실제 사안에서 이를 관철되는 게 쉽지만은 않다. 법률관계의 실질을 인정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근로관계에서는 일부 영세업체들 사이에서 이런 점을 악용해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법인의 간판을 수시로 바꿔 달거나 여러 개의 유령업체(페이퍼 컴퍼니)를 동원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와 관련, 최근 의미 있는 판결이 있었다. 다수 사업체를 운영하는 동일한 사업주가 근로자를 자신의 다른 업체로 형식적으로 이직시킨 후, 각 사업체에서의 근무기간이 1년이 되지 않았다며 퇴직금을 주지 않았다. 이에 대해 춘천지방법원 단독3재판부(부장판사 엄상문)는 지난 1월 12일, 이러한 변칙적 탈법행위에 근로자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실관계는 아래와 같다. 
백씨는 서울에서 A출판사, B학원, 동영상서비스업체 C주식회사 3곳을 운영하였다. 김씨는 2016년 11월부터 신림동 고시촌에 있는 백씨의 A출판사에서 변호사시험 기출문제 해설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2017년 4월, 사업주 백씨는 김씨에게 정직원이 될 수 있다며 자신이 운영하는 B학원으로 옮겨 일하라고 했고, 김씨는 B학원과 새롭게 근로계약서를 쓰고 일을 시작했다. 김씨는 그렇게 2018년 2월까지 B학원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사업주 백씨가 퇴직금 등을 지급하지 않아 김씨는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행권고결정이 확정되었다. 또한 이를 근거로 백씨에게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 결정이 송달되었다. 그러자 사업주 백씨가 근로자 김씨를 상대로 청구이의 소를 제기하였다.

이 사안에 대한 법적 쟁점은 다음과 같다.
위 소송에서 사업주 백씨는 출판사와 학원은 완전히 법인이 다르며, 김씨가 출판사에서 퇴직하고 학원과 새로이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만큼 근무기간이 각각 1년이 되지 않으므로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중간에 이직이 있었던 만큼 고용관계가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법원은 아래와 같이 판단하였다. 
우선 법원은 위와 같은 형식적 이직에도 불구하고, 김씨가 백씨의 지시에 따라 도서출판사 업무를 계속 수행하였다고 보았다. 그 판단의 근거로 김씨는 도서출판 교재 업무를 백씨가 지정한 같은 장소에서 계속 담당하였고, 별도로 사직서를 제출한 증거가 없으며, 업무보고에 따르면 김씨는 새로이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후에도 계속 같은 작업을 해 왔다고 지적하였다. 사업주 백씨는 근로관계가 단절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도 김씨가 계속 같은 업무를 한 점을 설명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근로계약서를 새로이 작성하고 입금자 명의가 달라졌다는 (형식적) 사정만으로 근로관계가 단절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사업주 백씨는 도서출판사와 학원은 엄연히 법인격이 구분된다고 주장하였지만, 동일한 사업주가 같은 장소에서 간판만 세 개를 걸어놓고 내부에서 파티션으로만 구분해 놓았다. 또한 백씨는 구인광고에서는 도서출판사와 학원이 같은 회사라고 하였고, 경리 업무도 모두 백씨가 처리하였으며, 김씨의 업무내용 보고도 모두 동일한 전산시스템으로 이뤄졌다. 무엇보다도 근로자가 동일한 장소에서 계속하여 같은 업무를 하였던 점을 중요하게 보았다.

‘근로관계는 실질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법리이나, 실제에 있어 계약서와 다른 근로관계의 실질을 인정받거나 법인격이 부인되는 경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관련 법령을 회피하는 꼼수가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이와 같은 법원의 태도는 근로자를 보호하는 법령의 취지를 살리기 위하여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사진=이강준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