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이 판결문’ 언제까지

소액사건 분류되면 판결이유 알 수 없어

분쟁해결 못하는 소액사건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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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신용정보회사는 2019. 3. 채권추심원으로 일하다 회사를 떠난 B씨한테서 300만원의 퇴직금 청구 소송을 당했다. 1년 반 걸친 법정 공방 끝에 2020. 8. 판결이 선고됐다. 결과는 A의 패소였다. 채권추심원 퇴직금 소송은 채권추심원의 ‘근로자성’ 입증 여부가 쟁점이다. 입증 여부에 따라 사건별로 결과가 달라진다. 유사사건 경험이 많은 A 회사는 B의 주장과 입증을 모두 반박했다고 보고 승소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뜻밖의 결과를 받은 A 회사는 난감했다. 패소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판과정을 다시 살펴봐도 원인을 찾지 못했다. A 회사는 2주 안에 항소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2. C 회사는 2019. 3. D 회사를 상대로 900만원의 물품대금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변호사 없이 ‘나홀로 소송’으로 재판을 마쳤다. 결과는 2019. 9. C의 패소였다. C는 즉시 항소했고, 이번에는 변호사의 조력을 얻어 재판을 시작했다. D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변호사를 선임했다. 6개월 걸렸던 1심 재판에 반해 2심 재판은 1년째 법정 공방 중이다. 1심 판결의 이유를 알 수 없어 쟁점을 다시 정리하다 보니 1년이 훌쩍 가버렸다.

#3. E씨는 2019. 11. F 회사를 상대로 8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F 회사의 공사현장 인근에 주차를 했다가, 공사현장에서 떨어진 낙하물에 의해 차량이 손상됐다는 이유다. E씨는 소장 제출 후 한참을 기다렸지만 법원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에 2020. 5. 기일지정신청을 했고, 2020. 8. 첫 재판이 열렸다.

현행 소액사건심판법은 소액사건의 범위를 대법원규칙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근거한 소액사건심판규칙은 소송가액 3000만원 이하의 제1심 민사사건을 소액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민사사건은 소송가액 3000만원까지는 소액사건, 3,000만원 초과 2억원까지는 단독사건, 2억원 초과는 합의부사건으로 분류된다.

소액사건으로 분류되면 간이절차에 따라 처리된다. 판사는 되도록 한 번의 변론만으로 판결을 내리려고 한다.

다만 다툼이 심한 경우 소액 집중심리 재판부에서 사건을 다룰 수 있다. 재판부의 심리시간을 확보하고 당사자에게 보다 충실한 변론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조치다. #1에서도 첫 재판 이후 집중심리부로 사건이 재배당됐다. 집중심리부에 재배당돼 다시 재판이 열리기까지 반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A 회사를 대리한 변호사는 “채권추심원들이 제기하는 퇴직금 소송은 대부분 소액사건이지만 근로자성 인정 여부를 두고 공방이 치열하다. 사건이 집중심리부에 재배당돼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검토를 할 수 있었다”며 “적어도 집중심리부에서 다룬 사건만큼은 판결이유가 기재돼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사건을 검토하였고, 다툼이 많은 사건인 만큼 당사자들도 변론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심리는 충실히 해 놓고, 소액사건이라는 이유만으로 판결문에 판결이유를 적지 않은 것은 모순이다”고 덧붙였다.
현재와 같은 소액사건 처리 방식은 분쟁 해결이라는 재판의 본질적 역할과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있다.

대한변협 감사인 홍성훈 변호사는 “소송은 누가 어떻게 옳은지 가려달라는 것이다. 긴 시간 소송을 했는데 이유도 모르고 패소하면 과연 그 재판이 분쟁을 해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다”고 말했다.

#1에서 A 회사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더 이상 재판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패소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항소를 해야 할 상황에 몰린 것이다.

소액사건도 항소하면 소송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 법에 문외한인 사람이 패소 이유도 모른 채 항소이유서를 작성하기가 만만치 않다. 때문에 1심보다 변호사를 선임할 필요성이 크다.

#2에서 ‘나홀로 소송’ 끝에 패소한 C도 2심에서는 변호사를 선임했다. 비록 1심에서 승소했지만 2심에서 법률전문가를 상대하기 벅찬 D도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었다.

법원은 2017년 1월 1일부터 기존 2000만원이던 소액사건 기준을 300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단독사건의 수를 줄여 단독판사의 심리 충실화를 도모하기 위한 조치였다.

소액사건 범위가 확대되자 연간 70만건 밑으로 내려왔던 사건 수가 다시 70만건을 넘었다. 2019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4년 79만8215건, 2015년 70만 2273건, 2016년 68만6407건으로 감소하던 소액사건 수가 2017년 77만4440건, 2018년 70만8760건이 됐다.

사건 수 증가는 신속 처리를 목적으로 하는 소액재판 제도의 취지를 몰각시킬 수 있다. #3에서 E도 소장 접수 후 첫 재판까지 10달이 걸렸다.

홍성훈 변호사는 “소액사건심판은 소액의 경미한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한 특별간이재판이다. 지금처럼 시일이 오래 걸리는 것은 입법취지대로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며 “게다가 판결이유도 알 수 없다. 분명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사진=법무법인 정솔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