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낭기의 관점]대법원 판결문에 드러난 '한만호-한명숙 재판'의 전말

검찰 수사 과정 문제·객관적 증거 유무 모두 다뤄

대법관 8대5로 나뉘어 치열한 공방…신랄한 표현도

이미 검토된 내용 '재수사·재판' 주장 설득력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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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한만호 비망록' 논란에 대법원 판결문을 읽어 봤다. 한명숙 전 총리에게 유죄를 확정한 판결문이었다. 도대체 13명이나 되는 대법관들이 무얼 어떻게 재판했기에 이렇게 논란이 벌어지는지 궁금했다. 판결문은 깨알 같은 글씨로 한 면 전체를 채운 A4 용지 12장으로 돼 있었다. 200자 원고지 110장 안팎 분량이다. 이 긴 판결문에는 대법관들이 8(다수 의견) 대 5(반대 의견)로 나뉘어 치열한 공방을 벌인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한만호씨는 수표, 현금, 달러 등으로 총 9억원을 3억원씩 세 차례에 걸쳐 한명숙 전 총리에게 줬다고 한 검찰 진술은 회유와 압박에 의한 허위이며,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법정에서 검찰 진술을 번복했다고 비망록에 썼다. 대법원 재판의 핵심 쟁점은 한씨의 번복에도 불구하고 ‘9억원을 줬다’는 검찰 진술을 믿을 수 있느냐였다. 다수 의견을 낸 대법관 8명은 믿을 수 있다고 했다. 반대 의견을 낸 5명은 3억원은 믿을 수 있으나 6억원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6억원 부분에 대한 5명 대법관의 논리와 판단은 요즘 한만호 비망록을 들어 문제를 제기하는 일부 언론 및 더불어민주당의 주장과 거의 똑같았다.

5명은 “검찰이 적법 수사 원칙을 어겼다”며 “다수 의견은 잘못된 수사를 토대로 유죄를 인정한 원심 (2심을 지칭) 심리를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옹호했다”고 질타했다. "비록 진범이 처벌을 면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은 처벌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형사재판의 기본 원칙이고 법원의 존재 이유"라며 “다수 의견은 무죄추정원칙에 반하고 증거재판주의에 정면으로 어긋난다”까지 했다. 다수 의견을 너무도 신랄히 비판해 ‘대법관들끼리 저렇게 심하게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치열한 공방은 대법관 13명이 한만호 비망록을 통해 제기된 문제들을 이미 충분히 다뤘음을 보여준다. ‘비망록’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한씨가 비망록에 쓴 내용과 거기서 제기된 문제들을 중요한 쟁점으로 다뤄 점검하고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어떻게 다뤘는지 주요 쟁점 별로 보자.

①한만호씨가 ‘ 9억원 줬다’는 검찰 진술을 하게 된 경위를 어떻게 봐야 하나

다수 의견은 “한씨가 인위적으로 진술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 근거로 “한씨의 검찰 진술 이후 그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금융자료, 달러 환전 기록, 비밀 장부, 채권 회수 목록, 한씨 회사 경리부장의 진술 같은 증거들이 차례로 조사되고 제출됐다”는 점을 들었다. 만약 한씨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없는 사실을 만들어 냈다면 어떻게 그 진술에 부합하는 자료들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 의견을 낸 5명 대법관은 한씨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진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이들은 “한씨가 사기죄로 징역 3년이 확정돼 수감 생활을 하고 있던 도중에 비자금 조성 내역을 알고 있는 X로부터 수사에 협조하면 가석방 등의 선처가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점을 근거로 꼽았다. 이는 비망록 내용과 비슷하다. 비망록에는 X가 한씨에게 “사장님 협조하시고 도움을 받으시지요. 앞으로 다른 건 추가 기소로 또다시 어려워지실 텐데요…”라고 했다고 나와 있다.

②한씨가 검찰에서 허위·과장 진술을 했을 가능성이 있나 없나

다수 의견은 그럴 가능성을 부정했다. 다수 의견은 “한씨가 1심 법정에서 스스로 한 전 총리를 존경과 자부심의 대상이었다고 표현한 바 있다”고 했다. “그런 한씨가 있지도 않은 허위 사실을 꾸며내거나 굳이 과장 왜곡해 한 전 총리를 모함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다수 의견은 특히 “한 전 총리에 대한 배신감, 빼앗긴 회사를 되찾으려는 목적이나 추가 기소에 대한 두려움, X의 회유 등 한씨가 검찰에서 허위로 진술한 동기라고 주장되는 사정은 모두 검찰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할 만한 근거가 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나 반대 의견은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고 했다. 반대 의견은 “한씨가 비자금 사용 내역을 밝히지 못하면 횡령죄로 처벌받을 수 있고, 수사 협조 대가로 (회사 경영권을 탈취한 사람들에 대한 검찰 수사를 이끌어내) 회사 경영권을 되찾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빼앗긴 회사를 되찾으려는 목적이나 추가 기소에 대한 두려움’ ‘X의 회유’ 같은 말은 한만호 비망록에 나오거나 비망록을 들어 일부에서 제기하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다수 의견과 반대 의견은 이 내용이 한씨의 검찰 진술에 미쳤을 가능성을 다르게 봤다. 다수 의견은 허위로 진술할 만한 동기라고 볼 수 없다고 했고, 반대 의견은 그런 동기로 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③검찰의 한씨 수사 과정에 문제가 있었나 없었나

다수 의견은 문제가 없다고 봤다. 다수 의견은 “한씨가 수십 회에 걸친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한 전 총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한 것은 사실’이라고 법정에서 인정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를 들어 “한씨가 검찰 진술의 진정 성립성과 임의성을 긍정했다”고 평가했다. 진정 성립성과 임의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피의자가 수사 기관에서 본심 그대로 자유롭게 진술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회유나 압박은 없었다는 말이다.

반대 의견은 검찰 수사가 적법성에 어긋난다고 했다. 회유나 압박이 아닌 절차 문제를 이유로 들었다. “한씨가 70회 이상 검찰에 출석해 조사받았는데 1회의 진술서와 5회의 진술 조서만 작성됐을 뿐 그 밖에 60회 넘은 검찰 출석 동안 어떤 조사를 받고 어떤 진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일부 언론이 제기한 문제와 내용이 같다. 반대 의견은 “이는 진술 증거 취득 과정을 투명하게 해 절차적 적법성이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는 적법성 보장 원칙에 어긋난다”고 했다.

반대 의견은 “검사는 한씨가 9억원을 제공했다는 진술을 하자마자 진술 조서를 작성하고는 그 진술을 번복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인위적으로 증명력만을 확보하고자 했다”고도 지적했다. 검찰이 한씨에게 진술 조서를 암기시켜 재판 때 착오없이 진술하게 하려고만 했다는 뜻이다. 비망록 내용과 같다. 비망록에는 “자필 진술서 작성 이후부터는 한만호는 없어지고 오로지 검찰의 안내대로 따르는 강아지가 되었고 (중략) 방에서 운동장에서 시험 준비하느라 혼자 중얼중얼대서 다른 수감자들이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봤다”고 돼 있다.

④9억원 사용처에 대한 한씨의 법정 진술을 믿을 수 있나 없나

한씨는 9억원을 ‘한 전 총리에게 줬다’던 검찰 진술을 뒤집고 법정에선 한 전 총리 비서에게 빌려주거나 공사 수주를 위한 로비 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진술했다.

다수 의견은 이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이전까지 한씨와 금전 거래가 없던 한 전 총리 비서가 변제 시기나 이자 약정도 없이 현금으로 3억원을 빌린다는 것은 경험칙에 반한다 ➧3억이라는 거액을 계좌 이체가 아닌 현금과 1억원 수표로 주고 받을 이유가 없다 ➧한씨가 공사 수주를 위한 로비 대상으로 거론한 두 명은 달러를 받은 사실을 법정에서 부인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반대 의견은 한씨 법정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구체적인 근거를 대는 대신 공판중심주의와 직접심리주의 원칙을 들었다. “한씨는 공개된 법정에서 거짓말하면 위증죄로 처벌받겠다고 선서한 다음 검사와 피고인 측의 상호 교차 신문, 나아가 법관의 보충 신문을 통한 검증 과정을 거쳐 진술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법정 진술은 검사가 한씨와의 문답 내용을 그대로 기재한 것도 아니고 요약·정리해 기재한 검찰 진술보다 더 무게를 둬야 한다”고 했다.

⑤한만호씨 검찰 진술을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가 있나 없나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을 하려면 그의 진술을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 이른바 물증이 있어야 한다. 피고인이 설사 범행을 부인하더라도 객관적 자료로 혐의가 인정되면 유죄 판결을 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한만호씨의 검찰 진술을 뒷받침할 객관적 자료가 있느냐 없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다수 의견과 반대 의견은 이 대목에서도 첨예하게 갈렸다. 서로가 장황할 정도로 다른 쟁점보다 자세히 주장을 폈다.

다수 의견은 그 지료가 있다고 봤다. 요지는 이렇다. ➧한씨 회사의 경리부장이 한씨 지시를 받고 작성한 뒤 한씨 확인을 받은 비밀 장부 (비자금 관리용 예금 계좌의 입출금 내역과 사용 내역), 달러 환전 기록, 경리부장이 별도로 작성한 채권회수 목록 등이 한씨의 검찰 진술과 부합한다 ➧한씨가 한 전 총리에게 전달하는 자금임을 은연중 말했다는 경리부장의 진술은 이런 정황과 금융 자료 등으로 볼 때 신빙성이 인정된다 ➧한씨가 발행한 1억원짜리 수표를 한 전 총리 동생이 전세 자금으로 사용했다 ➧한씨로부터 회사가 부도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 전 총리가 현금 2억원을 돌려줬다.

다수 의견은 “9억원의 사용처에 관한 한만호의 검찰 진술 중 1억원 수표와 현금 2억원 등 3억 부분에 부합하는 증거가 나타났다면 나머지 6억원 부분까지 포함한 전체 진술의 신빙성이 증명됐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특별한 이유 없이 6억 부분만 분리해서 그 신빙성을 달리 평가할 이유는 없다”고 했다.

반대 의견은 다르게 봤다. 1억원짜리 수표를 한 전 총리 동생이 전세 자금으로 쓴 것과 한 전 총리가 한씨에게 2억원을 반환한 사실은 객관적 자료로 인정된다고 했다. 이 점에서 한 전 총리가 3억원 받은 부분은 유죄라고 했다. 그러나 다수 의견이 인정한 경리부장의 진술, 비밀장부, 채권회수목록 등 기타 자료들의 신빙성은 모두 부정했다. 그 결과 나머지 6억원은 증거가 없다고 했다. 3억 부분과 6억 부분을 분리해 그 증거 유무를 다수 의견과 다르게 판단한 것이다.

반대 의견의 요지는 이렇다. ➧경리부장은 자금 전달에는 관여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한씨의 말만 듣고 한 전 총리에게 자금이 전달됐을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해 진술한 것으로 보여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경리부장이 회사 퇴직 2년여가 지날 때까지 자신의 차 트렁크에 비밀 장부 사본을 보관하다가 검사의 주선으로 (수감중인) 한만호씨를 만난 뒤 갑자기 이를 발견해 검찰에 제출했다는 경위도 납득하기 어렵다 ➧경리부장이 작성한 채권 회수 목록은 경리부장이 사후에 한만호씨 확인을 거치지 않은 채 자기 생각대로 작성한 것이어서 허위가 개입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시 수사·재판' 주장은  사법제도 불인정하는 꼴

대법관들은 이처럼 쟁점마다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8명과 5명 중 어느 쪽 판단이 진실과 맞는지는 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비망록을 통해 제기된 여러 쟁점들이 재판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되고 검토됐다는 사실이다. 대법관들은 검찰 수사에 문제가 있는지, 진술 번복에도 불구하고 ‘9억원 제공’ 검찰 진술을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지를 검토한 뒤 다수결로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의 다수결 판결은 재판 제도의 대원칙이다. 이를 부정하면 재판 제도가 성립할 수 없다.

비망록을 통해 제기된 문제들이 다뤄지지 않았다면 다시 수사와 재판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아닌데도 수사와 재판을 다시 한다는 것은 사법제도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수사하고 재판하자고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사법 제도는 있으나마나하게 된다. 이것이 대법원 판결문을 읽고 내린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