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산책] 입법과 입시제도만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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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 변호사(성균관대학교 노동법 박사과정)
입력 : 2019-11-17 09:00
수정 : 2022-06-04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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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월 25일 ‘학생부 종합전형에 대한 불신이 큰 상황에서 수시 비중을 확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수시 확대의 유지는 학생부의 공정성과 투명성, 대학의 평가에 대한 신뢰가 먼저 쌓인 후에 추진할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차라리 정시가 수시보다 공정하다는 입시당사자들과 학부모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며 정시 비중을 높이겠다는 방침을 확인했다.

정시 비중을 높이자고 주장하는 측은 ‘정시는 교사나 대학의 주관적인 평가 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학생들이 공정한 입시제도로서 받아들이고 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수시 비중을 높이자고 주장하는 측은 ‘수시와 학생부 종합전형은 정시에 비해 통계적으로 저소득층 등에게 유리하며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해소한다. 획일적인 수학능력시험에 비해 학생들에게 다양한 유형의 교육을 하기에 수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논의와 병렬적으로, 대학 평준화를 비롯한 타국의 대학 운영 방식을 벤치마킹하여 학벌주의의 폐해를 해체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나름의 가치와 설득력이 있다.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눈에 띄는 문제에 접근하려 한다.

도식적으로는 국회의 입법이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상정하여 정교하게 입법된다면, 행정부 공무원들은 기계처럼 국회의 지시를 수행하고, 판사 역시 기계처럼 법을 해석하면 항상 타당한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회의 입법은 정교하지 않으며 정교할 수도 없다.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입법을 하면 때로는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받지 않을 수 있고,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 용서받지 못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입법은 항상 판사가 구체적 사건에서 타당한 결론이 나올 수 있도록 해석할 여지를 둔다. 판사는 어떤 해석이 입법자의 의도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공정한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판사는 기계적, 일률적, 일도양단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비슷한 유형의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같은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가능한 사안을 세심하게 분석하여 사안별로 보다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판단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학벌이라는 단순한 기준에 따라 사람을 일률적으로 판단하지 않는 측면에 비유할 수 있다. 대신 각 개인의 구체적인 성향과 장점을 알기 위해 알맹이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노력이 이루어 진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대학입시와 학벌문화를 보자. 사람들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내신점수, 학생부, 수능점수, 등급, 특별전형 같은 구체적인 요소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그러한 세부사항과 알맹이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기라도 했던것처럼 숨겨지고, 학벌이라는 껍데기만 남는다. 그리고 그 학벌이 그 사람의 능력과 지위 자체이기라도 한 것인양 신성화된다. 학벌이라는 껍데기가 존재하기 이전에 실제 시험점수나 스펙, 경험 같은 알맹이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연극이라도 하듯이 이를 무시한다. 학벌이라는 껍데기 뒤에 숨겨진 알맹이를 묻는 것은 무례이거나 어른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학벌을 인식하는 방식의 특성 때문에, 학벌은 부정한 방법을 쓰거나 실력을 과장하거나 입시 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해서라도 손에 넣어야 하는 치장물이 된다. 학교 이름과 관계 없이 단단한 알맹이가 있으면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그 껍데기가 실력과 지위 자체처럼 상징화되기 때문이다. 재판에 비유하면 입법만을 중시하고, 사건별로 구체적인 사정을 세심하게 살피는 측면은 경시하는 것이다.

명문대는 더 좋은 교육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학생의 알맹이를 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학벌주의는 그렇게 작용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받는 교육의 구체적인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더 빛나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기 위해 경쟁한다. 학벌이라는 수단이 곧 최종목표가 된다. 구체적인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껍데기를 칭송한다.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여러 방안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로, 차라리 모든 시험점수와 스펙을 입시 이후에도 항상 공개하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다. 현재의 시험은 미래의 스펙이다. 지금의 스펙은 과거의 시험이다. 스펙은 부정적인 의미처럼 여겨지나, 이는 누적된 시험점수나 경험의 합계일 뿐이다. 차라리 대학에 들어갈 때, 직장에 취업하거나 대학원에 입사할 때 매번 반복해서 수학능력시험 점수와 내신 성적, 학생부를 비롯한 과거의 기록들을 구체적으로 다시 제출해서 구체적인 알맹이를 보여주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정의로운 법은 입법부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입법과 판사의 해석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입시제도라는 입법에 모든 정의를 담으려 하기 보다는, 하나의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와 장점과 단점을 종합적으로 매번 재평가하여 해석하는 부분을 중요시하는 것이 차라리 공정하다. 취약계층을 우대하는 전형이 있다면, 그 사람이 더 나은 대학에 진학하여 좋은 교육기회를 얻음으로서 알맹이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기회를 준 것으로 족하다. 학벌이라는 껍데기로 알맹이를 가리도록 허용하는 것은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부당한 결과를 낳는다. 학벌주의가 사라지고 알맹이를 평가한다면, 부정한 수단을 써서라도 명문대에 진학하려고 하는 시도는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조금이라도 나은 껍데기를 가진 대학이 아니라, 집에서 가껍거나 배움을 얻고 싶은 교수가 있거나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학교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지방에 사는 학생이 이후 해당 지방을 근거로 생활하고 싶음에도 ‘점수가 남아서 더 나은 껍데기를 얻기 위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현상은 실로 기괴한 것이다. 춘천에 살던 사람은 수학능력시험 만점을 받고도 강원대학교에 진학하고, 그 수학능력시험 점수를 계속하여 타인에게 제시함으로서 본인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을 때, 대학입시가 조금 덜 왜곡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사람을 학벌이라는 껍데기만 보고 획일적으로 평가하는 문화도 사라질 것이다. 점수에 맞춰 학교를 선택할 필요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같은 알맹이를 가지고도 입시제도나 우연에 따라 다른 껍데기를 얻게 되고, 그 껍데기가 평생의 평가를 좌우한다는 불합리를 개선하지 않으면서 입시제도 개선을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입시제도의 개선만으로 공정한 기회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입법의 개선만으로 공정한 법치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사진=김기원 변호사, 법무법인 율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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