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례로 보는 세상] 흑역사를 정리하는 법

  • '소멸시효'라는 장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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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정 변호사(법무법인 이안)
입력 : 2018-12-13 06:00
수정 : 2022-06-04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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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최근 검찰총장이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비상상고를 신청하여 화제다. 검찰 과거사위의 권고안에 따른 것이다. 물론, 비상상고가 받아들여지더라도 불법 감금과 폭행에 대한 무죄판결이 뒤집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검찰의 과오를 공적으로 확인하고 후속 피해보상의 발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30여년 전 일어난 인권유린으로 인한 피해를 배상받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공권력에 의한 조직적 인권유린이야 말로 100년이 지나도 보상을 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하나, 법률가로서 ‘소멸시효’라는 장애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소멸시효를 그대로 적용하면 과거사위원회의 결정과 후속 조치들은 당시 피해자들에겐 빛 좋은 개살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 헌법재판소와 법원이 이러한 소멸시효라는 허들을 깨뜨린 판결을 연달아 내어놓고 있어 향후 과거사 사건들의 피해배상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2. 소멸시효란?

소멸시효란, 권리불행사 상태가 계속된 경우 법적 안정성을 위해 그 권리를 소멸시키는 제도이다. 일반적으로 손해배상채권은 불법행위가 있은 날로부터 10년(장기시효),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날로부터 3년(단기시효) 중 어느 하나가 완성되면 시효로 소멸한다. 여기에 가해자가 국가인 경우에는 장기시효가 5년으로 단축된다.

소멸시효의 취지는 ① 오랜 기간 계속된 사실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법적 안정성에 부합한다는 점, ② 채무자가 채무를 이미 변제하였으나 시간이 지나 그 증명이 어렵게 된 경우 이중변제의 위험을 면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권리관계를 보호할 수 있다는 점, ③ 장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않은 경우 채권자의 권리행사 태만을 제재하고 그 권리불행사에 대한 채무자의 정당한 신뢰를 보호한다는 점에 있다.

3.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사건(2014헌바148 등)

가. 사건개요

2005년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하, ‘과거사정리법’)’에 따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가 설치되고 동 위원회는 간첩 누명으로 국가보안법위반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1982년 내지 1986년)들, 국민보도연맹사건(1950년경), 미군함포사건(1950년경)에 대해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사건 당사자들은 재심에 의해 무죄판결이 확정되거나 국가기관의 조직적 조작과 은폐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각 피해자들은 2010년부터 2013년에 거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에 이르렀고, 위와 같은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아니한 채 일반적인 소멸시효를 동일하게 적용하도록 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이다.

나. 헌법재판소의 판단

헌법재판소는 결론적으로 과거사정리법의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조작의혹사건’은 국가기관이 국민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움으로써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소속 공무원들이 이러한 불법행위에 조직적으로 관여하였으며, 사후에도 조작·은폐 등으로 진실규명활동을 억압함으로써 오랫동안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두 사건에 대하여 일반적인 소멸시효를 적용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하였다. 그 근거는 이렇다.

첫째, 과거사정리법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조작의혹사건은 국가가 현재까지 피해자들에게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무를 변제하지 않은 것이 명백한 사안이라는 점에서 ‘채무자의 증명곤란으로 인한 이중변제 방지’라는 소멸시효의 취지가 적용되지 않는 사안이라는 것이다(소멸시효 취지 ②번 관련).
둘째, 이러한 유형의 사건은 국가기관이 소속 공무원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피해자에 대해 불법행위를 저질렀으며 그에 관한 조작·은폐 등을 통해 피해자의 실효성 있는 권리주장을 장기간 저해한 사안이라는 점에서 ‘권리행사 태만에 대한 채권자의 제재 필요성과 채무자의 보호가치 있는 신뢰’도 그 근거가 되기 어렵다(소멸시효 취지 ③번 관련).
셋째, 무엇보다 헌법상 개인의 기본권 보호의무를 지는 국가가 이를 저버리고 조직적 관여를 통해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집단 희생시키거나 국민에 대한 장기간의 불법구금 및 고문 등을 자행하고도 피해자 또는 그 유족에게 이에 관한 손해를 배상하지 않고 있는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헌법에 반하는 것이고 법적안정성으로 정당화 할 수 없다(소멸시효 취지 ①번 관련).

다. 주의할 점

동 판결은 국가가 피해자로 하여금 사실상 권리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기간 동안은 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요약된다.
그렇다고 과거사정리법의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조작의혹사건’에 대해서는 소멸시효가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혼돈의 구름이 걷힌 때부터는 피해자는 적극적으로 권리행사에 나서야 한다. 따라서 사안에 따라 ‘진실규명결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이나 진실규명결정 이후 ‘과거 유죄판결에 대한 재심판결 확정을 안 날로부터 3년’ 이내에는 반드시 국가배상청구를 하여야 한다.

4. 일명 ‘구로공단’ 사건(2013가합530066 판결)

가. 사건개요

서울 구로동 일대 약 30만평의 토지 중 일부가 1950년 구 농지개혁법 시행으로 농지로 분배되었다. 이후 1961년 산업진흥 및 난민정착구제사업의 일환으로 국가는 수분배자들의 토지를 포함 구로동 일대에 구로공단 등을 조성하였다. 이에 수분배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이전등기 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패소판결을 받은 박정희 정권은 소를 제기한 당사자들과 그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 공무원들을 수사 명목으로 불법구금하거나 폭행, 가혹행위를 통해 소취하나 권리 포기를 강요하는가 하면 소송사기로 기소하여 유죄판결을 선고한 후 결국 합법으로 가장해 수분배자들의 토지 소유권을 취득하게 된다.

35년이 흐른 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상기 사건에 대해 “농민들을 집단적으로 불법 연행하여 가혹행위를 가하고 위법하게 권리포기와 위증을 강요한 것은 형사소송법상 재심사유에 해당한다”는 진실규명결정을 하였다. 이에 유죄판결을 받았던 사람들은 재심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고 나아가 2013년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나.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과 법원의 판단

이에 대해 국가는 원고들의 수분배권 상실에 따른 손해배상채권은 5년의 시효가 경과하였다는 항변을 하였으나 법원은 “국가의 조직적·체계적 공권력 남용으로 인해 원고들로서는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이 있고, 과거 패소한 민사소송에 대한 재심판결이 확정될 무렵까지는 피고를 상대로 권리행사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특별한 사정이 있었으므로” 피고가 시효주장을 하는 것은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하며 시효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5. 나가며

2005년 국회가 제정한 과거사정리법의 취지는 단순히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여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피해 회복이 국가의 의무라는 것을 확인하는데 있다. 즉,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 방법으로 국가배상청구를 선택할 경우 이 또한 수용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소송에서 국가가 새삼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국민의 합의를 거스르는 것이 아닐까.
 

[사진=법무법인 이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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