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불법에 양보할 필요 없다”

  • 강제키스 혀 절단 사건
  • 56년 만에 정당방위 재심 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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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5-10 08:43
수정 : 2020-05-10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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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5월 6일 오후 8시.
최말자(74·여)씨는 집 앞에서 처음 보는 노 모씨가 버티고 서서 자신을 찾아온 친구 박 모씨의 진로를 방해하자 할 말 있으면 자신에게 하라고 했다. 이들은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길을 걸었다. 집에서 150m 쯤 되는 곳에 이르자 최씨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며 돌아섰다. 이때 노씨는 키스를 하려고 했고 최씨는 거절했다.
하지만 노씨는 그의 발을 걸어 쓰러뜨린 뒤 배 위에 올라타 엎드려 강제키스를 시도했다. 최씨는 이를 뿌리치고 일어났지만, 노씨는 다시 그를 쓰러뜨려 눕히고 강제키스를 하려 했다. 최씨는 또다시 뿌리치고 일어났지만 노씨는 또다시 그를 넘어뜨려 놓고 계속 강제키스를 시도했다.
최씨는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힘껏 깨물었다. 겨우 자리를 벗어난 최씨는 노씨의 혀가 1.5cm 정도 잘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들었다.
수사과정에서 경찰은 최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혐의 의견으로 송치했지만 검찰이 이를 뒤집었다. 최씨는 검찰 조사 첫날 구속됐다. 6개월간 구속 상태서 재판을 받은 그는 중상해죄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반면, 강간미수 혐의가 아닌 특수주거침입 등 혐의로 재판을 받은 노씨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성폭력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가해자의 혀를 절단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최씨가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다. 최씨는 지난 6일 정당방위를 인정해 달라는 내용의 재심 신청서를 부산지방법원에 냈다. 최씨는 미투 운동에 용기를 얻어 2018년 12월 부산여성의전화 상담소 문을 두드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정당방위를 다툰 대표적 판례로 형법학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대법원도 1995년 100년사를 집대성한 <법원사>를 발간하면서 이 사건을 소개했다.

논문도 있다. 1995년 고려대 법과대학 심재우 교수의 ‘강제키스에 대한 혀 절단사건은 정당방위인가 과잉방위인가?’가 그것이다. 심 교수는 논문에서 법원 판단 잘못됐다며 비판적 견해를 밝혔다.

최씨가 유죄를 받은 것은 재판부가 정당방위 아닌 과잉방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당방위가 인정되면 무죄지만, 이를 넘어선 과잉방위는 유죄이다. 다만 정황을 참작해 형이 감면될 수 있을 뿐이다.

심 교수는 논문에서 “정당방위와 과잉방위는 유죄, 무죄의 차이가 있다. 만일 정당방위를 과잉방위로 잘못 판단한다면 그것은 무죄인 자를 유죄로 만드는 것이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그러한 잘못된 판단은 ‘법은 불법에 양보할 필요가 없다’는 정당방위의 법정신을 위축시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당방위권의 포기를 강요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정당방위와 과잉방위의 구별은 방위행위의 상당성 유무에 달렸다. 어떤 척도에 따라 상당성을 측정하느냐가 문제”라며 “(재판부가 적용한 척도인) 법익균형의 원칙은 정당방위의 상당성을 재는 척도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법익균형의 원칙에 따르면 보호법익이 침해법익 보다 높은 가치를 가질 때만 정당방위가 가능하다. 반대로 보호법익이 침해법익 보다 가치가 낮다면 정당방위는 불가능하다. 이 원칙에 따르면 강도를 만난 사람은 정당방위를 할 수 없다. 강도에 대한 정당방위는 생명, 신체를 해치지 않고는 어려울 것인데, 보호법익인 재물은 침해법익인 생명이나 신체보다 가치가 낮기 때문이다.

심 교수는 논문에서 “결국 법원의 판결은 방위행위의 ‘상당성’을 법익의 ‘균형성’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정당방위의 한계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대부분의 경우 정당방위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뿐만 아니라 본사건에 있어서 법원은 법익균형 자체도 잘못 형량하고 있다”며 “본사건에서 충돌되는 법익은 ‘혀’와 ‘정조’이다. 그런데 법원은 혀를 정조보다 높은 가치로 보고 있다. 과연 그런가?”라고 밝혔다.

한편 대법원이 1989년 유사사건에서 정당방위를 인정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최씨 사건에 쏠리는 관심이 더 커졌다.

최씨는 지난 4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억울한 상처에도 힘이 없고 길을 몰라서 이렇게 살아왔지만, 배움을 통해 용기를 내게 됐다”며 “56년이 지나 시대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비슷한 피해를 보는 여성들이 많은 것 같고 수사기관과 재판부의 2차 가해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밝혔다.

그는 “나의 재심 청구로 아직 용기 내지 못한 여성이 당당히 사실을 밝히고 상처를 회복했으면 좋겠다”며 “여성이 보호받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이번 재심 청구가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56년 만의 재심청구…정당방위 인정될까 (부산=연합뉴스) 손형주 기자 = 6일 오후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성폭력 피해자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1964년 성폭행을 시도하려던 가해자의 혀를 깨물었다가 중상해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최말자 씨는 이날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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