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산책] ​진승록 교수 재심 무죄를 보며

과거, 권력으로부터 독립이 요원했던 법관

이젠, 여론으로부터 독립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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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6·25 한국전쟁 당시 서울법대 학장을 지냈던 진승록(1905~1985) 교수님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진교수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의 딸 진미경 교수가 2015년 재심 신청을 하여 이번에 드디어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진교수는 5·16 혁명 직후 간첩 혐의로 구속되어 1961. 12. 13.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고등군법회의에서 12년으로 감형되고, 다시 관할관 확인 절차에서 10년으로 감형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형을 살다가 1963. 6.경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것이다.

진교수는 어떡하다가 간첩 혐의를 받은 것일까? 1954년 진교수의 처남 공규민이 황해도 옹진에서 내려와 진교수를 찾아왔는데, 검찰은 이를 남파간첩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진교수는 처남이 찾아오자 아내에게 당장 내보내라고 하고, 즉시 집을 나가 다음날 곧바로 신고까지 했다고 한다. 진교수는 6·25 때 납북되었다가 탈출하여 살아 돌아온 사람이다. 이미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몸서리치게 겪은 분이라, 오래간만에 찾아온 처남이라고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가는 당장 경을 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관제간첩을 만들어내려는 박정희 정권의 마수를 끝내 피해갈 수 없었다.

이데올로기가 광기를 부리던 시대에 이렇게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람이 어찌 진승록 교수 한 사람뿐일까? 전에 서울시 공무원 유오성씨가 억울하게 간첩으로 구속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난 사건을 다룬 영화 <자백>을 본 적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 동안 억울하게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가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 명단이 화면에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명단이 화면의 상단 끝을 넘어가도록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명단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재심 신청은 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그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진승록 교수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장은 방청석에 있던 유족들에게 그 동안 진교수가 얼마나 억울하게 살았겠냐며 너무 늦게 무죄 판결을 내려 죄송하다고 하였단다. 그 사건 유죄 판결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새까만 후배 판사이지만 법원을 대표하여 사과를 한 것이리라. 사실 그 엄혹하던 시절에 이런 관제간첩 사건을 맡았던 판사들의 고뇌는 어떠했을까? 물론 피고인이 수사기관에서 고문 끝에 자백한 것을 실제 진실인 것으로 생각하고 재판한 판사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대부분의 판사들은 재판을 하면서 관제간첩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용기 있게 법적 양심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 판사도 있지만, 많은 판사들은 압력에 굴복하였다. 그 결과가 요즈음 재심 무죄로 나타나는 것이고...

이 얘기를 하다보니 내가 부산지방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할 때 생각이 난다. 당시 나는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사건은 맡지 않았다. 다행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런데 1990년인가?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영장 당직을 하다가 – 그 시절에는 영장 전담판사가 없었고 판사들이 돌아가면서 영장 심사를 하였다 – 한 압수수색영장을 검토하게 되었다.

부산 모 대학에서 축제기간에 학생들이 이북 영화를 상영하려고 하니 이 영화 필름을 압수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영장을 검토하면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공산주의를 전파하려는 영화나 이북 체제를 찬양하는 영화도 아닌데, 단순히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라고 무조건 대학생들이 보지 못하게 해야 하나? 당시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끝난 이후라 판사들에게 노골적인 압력은 없었지만, 나는‘과천에서부터 긴다’는 말처럼 혹시 내가 이 영장을 기각했다가 무슨 신분상의 불이익을 받는 것은 아닌가하는 고민에 빠진 것이다. 그 때 영장을 다 검토한 이후에도 영장을 앞에 놓고 1시간 이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에 빠졌던 것 같다. 지금 시대라면 이런 걸 놓고 고민한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시대가 변했지만 당시 과천에서부터 기던 나는 나름 심각하게 고민을 하였다.

결국 우리 사회가 이 정도 영화는 수용할 정도로 성숙하였다고 판단하고 영장을 기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이런 영장을 기각하면서 보통 영장을 기각하듯이 한, 두 줄로 기각사유를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기각 여부를 고민하던 시간 이상을 들여 영장 기각사유를 작성하였다. 국가보안법의 개념 정의부터 시작하여 국가보안법의 적용은 시대 상황에 따라 달리 할 수 있는 것인가, 달리 할 수 있다면 현 시대상황에 이 정도 영장은 기각할 수 있을 것인가 등등. 대체로 그런 식으로 영장 기각 사유를 써내려갔던 것 같다. 그렇게 영장을 기각하자 당시 거의 모든 신문·방송이 이를 보도하기도 했다.

지금 시대 판사들은 권력으로부터 압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시대가 변했으나, 지금 시대의 또 다른 문제는 여론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같이 극우, 극좌가 날뛰고 판사의 재판이 마음에 안 들면 판사에게 원색적인 욕을 하고 신상 털기에 들어가는 시대에는 아무래도 판사들이 자기 법적인 양심과 맞지 않는 여론 때문에 고민에 빠지기도 하리라. 그런데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을 것은 판사가 어떤 압력이나 유혹에 굴하지 않고 법적인 양심에 따라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 그리하여 거짓 양심과 가짜 뉴스가 판치는 어지러운 이 시대에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주는 것, 바로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쪼록 후배판사들이 힘들고 외롭더라도 이 변하지 않는 사명을 계속 지켜나가기를 바란다.
 

[사진=양승국 변호사 (법무법인 로고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