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변의 로·컨테이너] '가스라이팅'을 아시나요

  • “법적 책임 묻기 쉽지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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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5-18 07:00
수정 : 2018-05-2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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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는 물건을 실어 운반하는 도구다. 이 안에는 온갖 종류의 물건을 담을 수 있다. ‘로·컨테이너’는 알아 두면 쓸모 있거나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판례, 분야별 법 정보 등 유용한 법 이야기를 싣는다. 변호사인 장승주 기자가 담는다. [편집자 주]

#. 최근 명예훼손죄로 처벌 받은 뒤, 억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A씨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선 책임을 질 것이라면서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가스라이팅’을 당했다는 것이다. 현행 법 제도 안에선 이런 부분이 고려되지 않는 것 같아서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얼마 전 청소년들의 멘토로 알려진 소위 ‘나침반 목사’의 성추문이 폭로됐다. 그전에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사건이 사회를 뒤흔들었다. 이런 사례들을 ‘가스라이팅’으로 분석하는 시각이 하나 둘씩 나오고 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자존감과 판단능력을 해쳐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심리학 용어다.

가스등(Gas Light)이란 오래된 연극에서 유래됐다. 이 연극에서 남편은 집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만들었다. 부인이 집안이 어두워졌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오히려 아내를 탓한다. 이에 아내는 점차 자신의 현실인지 능력을 의심하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남편에게 의존하게 된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나 데이트 폭력 등이 대표적인 가스라이팅 사례다.

안희정 사건의 피해자는 “다 잊어라. 항상 잊으라는 얘기를 저한테 했기 때문에 내가 잊어야 하는구나. 그래서 저한테는 있는 기억이지만 없는 기억으로 살아가려고 그렇게 다 도려냈다”고 말했다. 피해자에 대한 안 전 지사의 지배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위 A씨는 남자친구로부터 비정상적인 관계를 요구 받았다. A씨는 그의 요구를 거절한 뒤에 “내가 너무 예민한가”, “내 언행을 곱씹으며 후회하고 자책했다”고 한다.

A씨는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SNS를 통해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폭로했다. A씨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자신만 떠안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명예훼손죄로 처벌을 받으면서 자신의 억울한 부분이 형량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게 A씨의 주장이다.

나아가 A씨는 가스라이팅을 이유로 맞소송을 진행하고자 한다. A씨도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선 가스라이팅이 불법행위로 인정돼야 한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법행위에서는 원칙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고의·과실을 입증해야 한다. A씨가 내밀한 관계 속에서 이뤄진 가스라이팅의 고의·과실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또 피해자가 손해배상을 받기 위해선 가스라이팅의 위법성이 인정돼야 한다. 개념도 낮선 가스라이팅에 대해 법원이 당장 위법성을 인정할지도 의문이다.

그나마 적용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규정이 형법 제303조 1항이다.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하여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간음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규정은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하여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으로 그 적용범위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다양한 유형의 가스라이팅 사례에 적용하기가 힘들다.

법은 ‘정의와 형평의 기술’이다. 각자에게 형평에 맞는 책임을 지우기 위해 필요하다면, 가스라이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법 제도 안에서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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